죽은 돼지를 많이 마주하는 요즘이다. 웬만하면 비건 식당 같은 데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잘 없었고 빨리 일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널리고 널린 육식 식당에서 되는 대로 일을 시작한지 세 달쯤 됐다.
고기를 서빙하고 손님한테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데 친절함이 업무의 일부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보면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조금 흠칫하게 된다. 정육점 앞만 지나도 우울해지던 예전과 달리 많이 무뎌졌거나, 혹은 독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도미니언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울어보았다.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역시 “맛있게 드세요”를 말해버렸다는 것이 싫어져 버린다. 그래놓고서 질질 운다는 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 부끄럽다. 이것도 인간중심적인 생각일 것이다.
나는 이런 현실과 너무도 기만적인 나 자신을 견디고만 있는 것이 싫어서 생추어리에 오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결국 생추어리에 처음 와서 새벽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뭐가 달라졌나 생각해보면 일단 사랑하는 새벽이가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새벽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만큼 도처에 널린 동물들의 죽음이 더 끔찍해졌다가 또 익숙해졌다가 하는데 이 감정들이 반복되는 것이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다. 조금 더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나는 이것이 새벽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왕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은 것들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면 사랑하는 마음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는 편이 훨씬 좋다. 새벽이가 나에게 곁을 내주는 순간들이 나는 좋고 새벽이를 좋아하는 만큼 더 비장해지는 걸 느낀다. 꼭 더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고(아 근데 너무 좀 오글거리는대 죄송합니다) 아파도 갈 병원이 없고 편히 잠을 잘 공간 하나 갖는 일도 결코 쉽지 않은 새벽이를 사랑한다는 건 그 뒷면에 비장함이 붙어있어야만 하는 일이 된다.
앞날이 무섭도록 막막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 체념하지 않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사랑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각자에게 소중한 일들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는 걸 안다. 온갖 사랑이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세상이 아직까지 굴러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제 이 자본주의 종차별 성차별 성소수차별 장애인차별(많기도하지) 각종 혐오 어쩌고 현실을 그냥 견디기만 하지 않는다. 이제는 비장하게 견디고 있다.
나는 늘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몰고 오는 무력감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비장함이 함께하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일단 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은 겨우 지지 않는 게 최선인 것 같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고 양송이 이거 내보낸다고 그래서 다듬고 있는 중인데 그냥 모르겠다. 읽어주시는 분들도 비장한 마음으로 새벽이생추어리를 뒷받쳐주고 계시는 걸까? 어떤 마음일지 궁금합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였다면 결코 가질 수 없었을 비장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