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생추어리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뿌리를 내리느라 번잡하고, 막막하고, 절실한 시간을 보내며 2024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올 해 유독 통감했습니다. 자연 수명이 80세인 인간과 15년 내외인 돼지의 시간은 사뭇 다른 속도로 흘러갑니다. ‘자연스러운’ 몸이 아닌 새벽과 잔디의 시간은 또 얼마나 다르게 흘러갈까요? 인간의 속도에 맞춰 이뤄지고 갖춰지는 것들이, 새벽과 잔디에게 더디게 느껴질 것 같아 언제나 마음 한 쪽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마음에 파묻히지 않고, 삽을 들고, 찌그러진 밥그릇을 들고, 오늘도 씩씩하게 그믐달 현장을 누빕니다. 꽁꽁 언 물그릇의 얼음을 깨고 따뜻하게 데운 미강 물을 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혹독한 기후위기의 날씨에는 돌봄이 더 바쁜 법이지요.
잔디의 방문에 달린 야자매트 소식을 전해드렸었는데요. 사실 새벽의 방에도 시도를 했었답니다. 결과는 참담했지만요. 시야를 가리는 야자매트가 거치적거렸던 것일까요? 간단하게 뜯어낸 새벽의 힘에 활동가들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습니다. 잔디처럼 조금이나마 덜 싸늘한 방에서 잠을 자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닿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표현하는 새벽의 표현 방식이 새삼 부럽기도 했습니다.
지난 여름 진행되었던 비건페스타에서, 새벽이생추어리는 <돼지에게 새로운 정의를!>이라는 캠페인을 홍보하기도 했었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돼지가 멸칭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종에 대한 혐오와 비하를 멈추고 정의를 찾아가자는 의미로 시작하게 된 캠페인이었습니다. 더럽고, 멍청하고, 탐욕스럽다는 온갖 모욕적인 표현을 함축하고 있는 멸칭을 이 사회에서 뜯어내고자 했던 노력. 그러나 지난 12월 3일. 계염의 밤 이후로 어쩌면 단기간에 가장 많은 돼지에 대한 멸칭을 접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인간 대표자를 비하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들에는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흔한 ‘개돼지’, ‘멧돼지’와 같은 표현은 많은 표현들 중 하나였습니다. 새벽과 잔디와 관계를 맺은 이후, ‘돼지’라는 단어가 주는 관계로 인한 친밀감이 새롭게 다가온 이들이 많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광장에서 마주한 혐오들 속에 다친 마음을 함께 다독이지 못해 아쉽습니다.
인간들의 정치 싸움이 동물들에겐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화가 날까요, 답답할까요. 하루하루 새로운 이슈와 혐오들이 쏟아지는 요즘, 다가올 새해에는 부디 지난 광장에서 소비되었던 약자 혐오가 더이상 설 자리가 없는 새해가 되길 절실하게 바라봅니다.
2025년, 잔디는 다가올 입춘에 다섯 살이, 여름에 새벽은 여섯 살이 되겠지요. 우리와 다른 속도로 가고 있는 새벽과 잔디의 삶을 그저 잘 기록하고, 돌봄으로 조력하는 것으로 다가올 생일을 맞이할 것입니다. 동물을 돌보는 것 자체가 운동이고 파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요.
언제나 조용히 지지해주는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2024년의 마지막 레터를 줄입니다.
애도할 일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애도할 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항공 참사로 인해 수많은 새들과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비록 몇 명의 새가 비행기에 끼거나 엔진에 들어가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새의 탓'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자명합니다. 혐오는 낮은 쪽으로 흘러 질책하기 쉬운 대상을 탓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철새를 죽여 '개체 수'를 조절한다는 방안은 너무나 손쉽고 인간중심적인 사고이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철새에게는 그곳이 본래 서식지입니다.
애도란 무엇일까요? 애도할 소식이 끊이지 않아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참사의 진상규명이 분명하게 이루어지고 원인의 '뿌리'에 변화가 생겨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에게도 안전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세상을 만드는 데 새벽이생추어리도 함께하겠습니다. 참사로 인해 돌아가신 모든 분들과 그리고 그 주변 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