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새벽이생추어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보리입니다.
새벽이생추어리는 축산업과 제약산업의 피해생존자인 새벽이와 잔디가 살아가는 공간이자 새벽이와 잔디를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새벽이와 잔디가 겪었던, 동물을 향한 전쟁은 가부장제, 자본주의만큼이나 역사가 길고 뿌리가 깊지만, 제가 알고 느낀 것들 위주로 말하려 합니다.
축산업 안의 동물들은 살아있지만 살아있을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분뇨가 쌓여있는 환경에 계속 밀집되어 갇혀있고, 항상 암모니아로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고기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개변된 몸은 다리는 약하고 몸집은 커서 제대로 서있기 어렵고, 심장이 커져가는 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급사합니다.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죽고, 살아있는 이들은 죽은 동료의 시체를 밟으며 삽니다. 재생산 능력을 가진 비인간동물들은 인간으로 치면 10대 초반의 나이부터 강간당하며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합니다. 고기로 쓰이는 돼지들은 6개월, 닭은 29일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임당합니다. 이 어린이들은 모든 삶, 모든 몸, 모든 관계를 빼앗긴 채 죽임당합니다.
이 모든 것은 감춰져 있습니다. 축산업과 육식주의 사회의 이해관계자인, 정부, 기업, 협회, 농장주, 연구자, 유통 판매 업자, 소비자까지, 촘촘하게 얽힌 거대한 이익집단이 육식주의 사회, 종차별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감추고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건 거대한 축산업 기업이며, 부작용은 외주화하면서 마치 ‘국민의 식생활과 건강’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비인간동물을 향해 거대한 전쟁을 행하고 있다는 점을 모릅니다.
저와 동료들은 감춰진 동물들을 만나기 위해 도살장 앞으로 갑니다. 도살장에 오는 많은 분들이 감정적으로 힘들어질까봐 걱정하면서 오는데, 오히려 무감각해서 당황하시곤 합니다. 그만큼 동물을 느끼는 존재로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인간화’가 뿌리 깊은 것이지요. 저 또한 여러 번 도살장 앞을 갔지만 최근에서야 돼지들이 온 몸으로 겪고 있는 폭력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에 오물을 묻히고, 탈장이 되고, 혹이 생기고, 상처가 있고, 트럭 안이 비좁아 다른 이에게 짓밟혀 비명을 지릅니다. 온 몸으로 나타내고 있는 폭력 외에도 저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도 끊어지지 않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을 먹으려고 하고, 감자를 맛있게 챱챱 씹어넘기고, 트럭 벽을 짚으며 탈출을 시도하고, 추위에 떨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습니다. 그들은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 채로 살아있음의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만났던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게 슬픕니다. 인간은 참사나 전쟁으로 인한 납득할 수 없는 죽음에도 유골을 찾고자 하는데, 그들의 몸은 인간이 다 먹어치워서 유해조차 수습할 수 없다는 게 슬픕니다. 농장에서, 도살장으로 실려가는 트럭 안에서, 삶을 함께한 이들 모두 같이 죽기 때문에,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게 슬프고 화가 납니다. 남는 기억은 가해자 집단의 일부인 인간동물들과 트럭 벽을 사이에 둔 잠깐의 만남이라는 게 화가 납니다. 그리고 이 잠깐의 만남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 이 사회에 분노가 입니다.
저는 한참 죄책감이 클 때 길을 걷다 문득, 돼지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들이,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그들이 들이마시는 악취와, 그들이 나가려고 하는 저항의 몸짓과, 그들이 겨우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실날같은 투쟁에 사로잡혀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지우고 멀끔히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의 모든 인간들이 그들이 겪고 있는 폭력의 아주 일부에라도 사로잡혀있길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몸을 삼키고 있는 이 도시가 멈추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동물을 향한 전쟁이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감히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도 그 믿음을 전염 시켰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