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 수 있을까?
함께 ‘살자’고 만든 공간인 생추어리에서, ‘함께’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요즘이다. 곤충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등에, 파리, 쇠파리, 모기 때문이다. 500원짜리 동전만 한 등에는 새벽이와 잔디의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다. 등에가 떠난 자리엔 새빨간 피가 흐른다. 등에가 난 상처로 파리들이 모인다. 파리가 붙어 세균 감염이 되기도 하고, 몸속에 알을 낳기도 한다. 수시로 모기들과 쇠파리가 날아와 피를 빨아먹는다. 여름이 되면서 새벽이와 잔디의 배에 울긋불긋 올록볼록한 상처들이 생겼다. 일반적인 소독약으로는 빨개지기만 할 뿐 가라앉지 않았다. 병원에 문의해서 벌레 물린 상처 염증을 가라앉히는 연고를 받아 매일 발라주고 있다. 다행히 연고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상처 염증은 끊임없이 새로 생겨났다.
새벽이와 잔디 건강을 해치는 곤충과 공존할 수 있을까? 작년 여름에도 같은 고민을 했다. 곤충을 모조리 죽이고 땅과 물을 오염시키는 살충제를 사용하는 건 환경에도 악영향을 주지만 혹시나 새벽이와 잔디가 먹는다면 새벽이 잔디의 건강도 해치고, 생추어리의 가치와 방향성에 맞을 것 같지 않았다. 모기가 싫어한다는 계피 우린 물을 뿌리고, 새벽이, 잔디 몸에 천연 아로마오일을 발라 곤충을 쫓으려는 소극적인 대처만 했다. (그 전 해에는 진드기로 고충을 앓아서 이미 진드기를 퇴치하는 외부 구충제는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온통 풀과 나무인 시골에서는 효과가 거의 없었다. 등에를 쫓는다는 천연 퇴치제 레시피를 검색해서 직접 만들어 새벽이에게 뿌렸지만 그걸 뿌리면 새벽이가 매우 가려워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새벽이 잔디가 벌레에 좀 물리는 게 그렇게 큰일일까?’, ‘곤충을 직접 죽이는 것보단 좀 불편해도 공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던 때. 잔디의 배에 보랏빛으로 부풀어 오른, 심상치 않은 상처가 생겼고, 급기야 병원에 내원하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염증이 심각해서 농이 찼고, 괴사한 피부가 있어 살을 도려내고 봉합하는 수술을 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제야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았다. 벌레에게 물린 것 때문에 수술까지 받게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했다. 게다가 새벽이에게 그런 염증이 생길 경우 수술을 하러 병원에 데려갈 수 없으니 최대한 사전에 막아야 했다.
그래서 곤충을 직접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살충제 사용은 하지 않지만,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파리 끈끈이를 설치하고, 등에가 보이면 가능한 한 때려서 잡았다. 그러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건, 생추어리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를’ 살리는 공간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생추어리 거주동물인 새벽이와 잔디의 건강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건강에 직접적으로 해가 되는 곤충을 죽이기로 한 것은 윤리적이진 않더라도 책임 있는 돌봄을 위한 조치였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새벽이와 잔디는 등에에게 물리고, 파리와 모기가 하루에도 몇십 명씩 몸에 붙는다. 완벽한 예방은 불가능하고, 다만 염증이 심해지지 않게 치료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같은 걱정을 한 보듬이 한 분이 집에서 반려견용 벌레 기피제를 가져와 주셨는데, 잔디에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만 새벽이는 그것도 가려워해서(알레르기 반응) 쓰지 못한다.
돌봄 할 때마다 때때로 불편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올라온다. 파리 끈끈이에는 호랑나비 한 명도 붙었다. ‘나비까지 죽이고자 한 게 아닌데’ 생각이 들지만, 애초에 끈끈이 자체가 누군가를 선택적으로 죽일 수 있는 장치도 아닐뿐더러, 내 속에 곤충을 해충/익충으로 나누는 인간중심적이고 종차별적인 시각이 있었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새벽이에게 연고를 발라주려고 배와 옆구리를 닦아내면, 빨간 깨알 같은 상처가 밤하늘의 별처럼 엄청나게 많이 퍼져 있고, 곳곳에 부풀어 오른 염증이 매일매일 새로 생겨난다. 그런 새벽이의 몸을 마주할 때면, ‘이렇게 살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흙과 풀과 진흙탕이 있는 야외 공간이 돼지로서 새벽이의 본능과 습성을 충족하기에 적절하다고 여기며 지내왔는데, 벌레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벽이와 잔디가 우릴 원망할 것만 같다. 왜 이렇게 살게 하느냐고. 가렵고 따끔거리고 벌레들이 너무 성가시다고. 실제로 새벽이와 잔디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알 수 없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가끔 옆구리를 긁는 걸 보고 ‘가렵겠구나’ 짐작할 뿐이다. 이렇게 민감하고 취약한 피부를 가진 새벽이와 잔디를 차라리 넓은 실내 공간에서 지내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현실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그것 또한 새벽이, 잔디의 돼지다움을 제한하는 환경이 되어버린다.
새벽이와 잔디는 공장식 축산업과 동물실험 산업에 의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필요에 맞춰진 몸으로 조절되었다. 그래서 야생의 돼지와 몸의 구조나 면역력, 피부, 이빨 등이 다르다. 야생의 돼지가 자연환경에 최적화된 몸으로 진화했다면, 그 야생성을 빼앗긴 새벽이와 잔디의 몸에 맞는 거주환경은 어느 정도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추어리 환경은 완전히 자연도 아니고 완전한 인공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딘가에 놓인 것일 테다. 새벽이와 잔디의 돼지로서의 본능을 충족하면서도 자연의 다른 생물들(대표적으로 곤충)로부터 해를 입지 않는 환경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최근에는 생추어리 이주 계획을 준비하면서, 이런 고민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다. 생태계를 최대한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의 패턴을 본떠 순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퍼머컬쳐’ 방식을 적용한다면, 예를 들어 새들이 좋아하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주변에 심어서 새들을 유인하고, 그들이 곤충을 잡아먹게 해서 개체수를 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 역시 등에를 줄일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완벽하게’ ‘깔끔하게’ ‘100퍼센트’ 혹은 ‘제로(0)’라는 것은 자연에 존재할 수 없는데, 인간만이 그것을 원하고 그동안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 문제(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를 처리해 왔던 것 같다. 인간다운 그 욕망을 내려두고 자연에 맡기는 것은 ‘함께 사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아 직접 시도해 보고 탐구해 봐야 알 것 같다. 그때까지 새벽이와 잔디가 부족한 인간들을 잘 참고 견뎌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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